1900

1900 ★★★★½

아마 pc충들은 초반 시퀀스의 소녀에게 들이대는 할아버지 지주를 보며 극혐이라 외칠테지만, 영화 전체를 보면 지주가 자살한 까닭이 욕망을 추구할수 없게되었기 때문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영화의 결말이 소작농의 지주가 되고자하는 욕망이 있기에 '지주는 죽지 않았다.'라고 말함 역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고민없이 베르톨루치에 대한 선입견만 남은채로 영화를 마무리한다면 그의 영화세계는 그저 '남근주의'라는 같지도 않은 말로 치부될 것이다.

'남근주의'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웃기다. 마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것이 남성적이라는마냥 칭한다. 그에 지성이 없는 것처럼 이름 붙였지만, 그 사이에는 여성은 섹슈얼리티로부터 배제해야한다는 또다른 편견과 성을 구분짓는 또다른 차별적인 시선임을 왜 알지 못할까.

칼 아츠의 맥캔드릭은 영화를 가르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영상 언어를 꼽는다. 그저 시나리오의 언어가 아니라, 영화상의 이미지가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할 것인가. 이러한 가르침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낳았고, 이는 디즈니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그럼에도 고작 섹슈얼리티를 이유를 들어 이것이 남성적이며 어쩌고 까내리는걸 보면 이 세상에 스크린 위의 여자가 아닌 영화를 보려는 이들이 정말 많이 사라졌구나라고 느끼면서, 동시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디즈니의 주고객이 되어가는 사실에 세상이 말세라 느낀다.

영화사 이래에 베르톨루치는 영상언어를 가장 실험적이면서 능숙하게 다루는 영화 감독 중 하나다. 특히나 <1900년>은 그의 영화 중에서도 그러한 테크닉을 매우 절제한 영화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어지간한 감독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 퀄을 가져오는데, 그저 그의 성향을 근거로 그러한 성취를 부정하는 꼴은 도저히 못보겠다.

아마 그들은 마리아 슈나이더의 케이스를 가져올테지만, 조금만 알아보면 근본적인 원인은 감독보단 말랜 브란도에 있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결국 <1900년>이 말하는 것은 극단의 이념으로 치닫아도 지켜야할 인간관계의 가치와, 이념이 가져오는 배경에는 정의나 평등 같은 옳고 달콤한 말이 아닌 결국 욕망에 기인해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그 당시도 그리고, 감독 본인을 향한 현대의 비판에 있어서도 그리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